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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5.04Branding, UX/UI

간판 글씨가 브랜드가 될 때

배민 글꼴이 10년 넘게 쓰이는 이유, 그리고 한글 웹폰트 이야기

간판 글씨가 브랜드가 될 때
오래된 간판이 빼곡한 서울의 골목

1. 배달앱이 글꼴을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동네 분식집 메뉴판이나 전단지에서 유난히 눈에 익은 글씨를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뭉툭하고 조금 삐뚤빼뚤한데 이상하게 정감이 가는 그 글씨, 상당수가 배달의민족이 만든 글꼴입니다. 우아한형제들은 2012년 한나체를 시작으로 주아체, 도현체, 연성체, 기랑해랑체, 을지로체까지 거의 해마다 한글날 즈음 새 글꼴을 무료로 내놓았습니다. 한나체가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글꼴은 반듯하고 읽기 좋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는데, 배민은 반대로 갔죠. 잘 다듬어진 글씨보다 사람 손맛이 느껴지는 글씨를 브랜드의 얼굴로 삼은 겁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퍼졌습니다.

배민 한나는열한살체와 주아체 소개 화면

2. 을지로 골목에서 가져온 목소리

그 방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을지로체입니다. 오래된 인쇄소와 공구상이 모여 있는 을지로 골목의 간판 글씨에서 출발했고, 2019년에는 출시와 함께 을지로에서 '도시와 글자'라는 전시까지 열었습니다. 손으로 그린 간판 글씨는 획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글자 사이도 들쭉날쭉하지만, 바로 그 불균일함 덕분에 사람 냄새가 납니다. 배민은 이런 글씨를 글꼴로 옮기면서 우리는 동네 가게와 같은 편이라는 이야기를 굳이 말로 하지 않고 보여줬습니다. 브랜드가 어떤 말투를 쓰는지는 카피보다 글씨 모양에서 먼저 전해질 때가 많습니다. 같은 문장도 어떤 글꼴로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까요.

손글씨 메뉴가 붙은 작은 국숫집

3. 무료로 풀었더니 브랜드가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이 글꼴들은 오히려 배민 앱 밖에서 더 자주 보입니다. 상업적으로도 무료로 쓸 수 있다 보니 작은 식당 메뉴판, 학교 행사 포스터, 유튜브 썸네일까지 정말 어디에나 들어갔습니다. 광고비를 따로 쓰지 않았는데도 전국의 간판과 전단지가 배민의 말투를 대신 퍼뜨려 줬습니다. 사람들은 그 글씨를 볼 때마다 어렴풋이 배민을 떠올립니다. 로고를 크게 박는 것보다 훨씬 은근하고 오래가는 방식입니다. 브랜드 자산이라고 하면 보통 로고와 컬러부터 떠올리지만, 배민은 글꼴 하나로 '배민스러움'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낸 드문 사례라고 봅니다.

여러 굵기의 활자가 인쇄된 종이

4. 세컨드펭귄의 시선: 한글 웹폰트는 예쁜 만큼 가벼워야 합니다

브랜드 글꼴을 웹사이트에 올릴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용량입니다. 영문 글꼴은 수백 자면 충분하지만 한글은 조합할 수 있는 글자만 11,172자라서 파일 하나가 몇 메가바이트씩 나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대로 올리면 첫 화면에서 글자가 늦게 뜨거나, 기본 글꼴로 보이다가 갑자기 바뀌는 깜빡임이 생기죠. 그래서 실제로 쓰는 글자만 남기는 서브셋, woff2 압축, 필요한 범위만 나눠 불러오는 unicode-range 같은 작업을 디자인과 함께 챙깁니다. 글꼴 종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글꼴은 브랜드의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가 늦게 도착하면 아무리 예뻐도 소용이 없으니까요.